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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산어보(玆山魚譜) 감상 후기

by OasiStock 2021. 5. 18.

개봉 전 자산어보의 예고편을 스치듯 보았을 때는 '요즘 같은 시대에 웬 흑백영화?' 했었다.

 

영화를 다 보고 난 후에는, '이 영화는 흑백영상이어야만 했구나' 했다.

영화 전체가 마치 움직이는 수묵화 같은 느낌.

내용도 내용이지만 영상미에 매료되었다.

특히 기억에 남는 장면은 극 중 정약전이 유배지인 흑산도에서 머물게 된 아낙의 집에서 달밤에 초가집 마루에 앉아 막걸리를 마시는 장면이었다. 왠지는 모르겠지만, 극 중 정약전이 달을 보면서 "달 구경 가야겠다"라고 했던 말이 너무나 공감이 될만큼 밤하늘에 휘엉청 떠있는 달이 너무나 아름다웠다.

그리고 그 장면이 현대의 흑산도 밤하늘이 아닌 조선시대, 정약전이 살아있는 당시의 밤하늘을 그대로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아득한 느낌을 주었다. 아마 흑백영상이 아니었다면 그런 느낌을 줄 수는 없었을 것이다.

영화 '자산어보' 풍광 포스터

영화의 간략한 스토리는 정약전이 흑산도로 유배를 가 그 곳에서 물고기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창대(昌大)라는 청년을 만나 어류에 호기심을 갖게 되고, 그의 도움을 받아 자산어보를 완성한다는 내용이다.

그 과정에서 성리학과 실학, 천주교(영화에서는 '실학 + 천주교 = 서학'으로 통칭하는 것 같다)에 대한 당대 사회의 인식, 이론과 현실의 큰 괴리 속에서 신문물을 접하고 새로운 세계를 맛본 지식인이 가지는 고뇌와 주변으로부터의 핍박, 이미 낡아버린 지 오래인 구시대적 사상의 끝자락을 붙잡고 시대가 변한 것을 깨닫지 못한 채 책 속의 세계에 매여있는 사람들의 모습 등을 엿볼 수 있었다.

또한, 영화 속 정약전은 굉장히 선구자적인 인물이고, 생각이 깨어있어 체면이나 구습에 매이지 않고 좋은 것은 받아들이고, 필요없는 것은 버리는 실용적인 자세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몸에 배어있는 태도는 신분제도의 상위계층인 양반의 그것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

실제 정약전이 그러했는지, 아니면 감독이 의도적으로 부여한 캐릭터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러한 정약전의 조금은 모순적인 생각과 태도가 개인의 모순적인 모습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당시 시대의 모순을 투영하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크게 기대를 하지 않고 본 영화였는데 근래에 본 영화 중 '미나리'와 더불어 담백하지만 오랜 여운이 남는 감동을 주는 영화라는 생각이 든다.

 

아직 안 보신 분이 있다면 꼭 보시기를 권해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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